“원장님, 우리 아이 앞니랑 어금니가 까맣게 썩었는데… 어차피 초등학교 가면 다 빠지고 새 이가 날 텐데 굳이 비싸게 은니 씌우고 치료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두다가 뽑으면 안 되나요?”
소아치과나 일반 치과에서 아이 부모님들이 정말 많이 하시는 질문입니다. “어차피 빠질 이빨을 굳이 돈 들여 치료하라는 건 치과의 상술 아닐까?” 하고 의심하시죠.
하지만 치과의사들이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기어코 유치를 치료하려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닙니다. 유치를 방치하면 평생 써야 할 ‘영구치’가 기형으로 나거나 아예 덧니 폭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유치가 가진 진짜 의학적 역할과, 충치를 방치하면 벌어지는 끔찍한 나비효과를 알려드립니다.
1. 유치는 생각보다 껍질이 너무 얇습니다 (KTX급 진행 속도)
이전 글 **[레진, 인레이, 크라운 차이점]**에서 성인의 치아는 단단한 껍질(법랑질)이 충치균의 진입을 어느 정도 버텨준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유치는 다릅니다. 성인 영구치에 비해 크기도 작고, 껍질의 두께도 절반밖에 안 되며, 석회화(단단함) 정도도 훨씬 약합니다. 게다가 치아 속의 신경(치수)은 매우 큽니다.
- 결과: 유치에 생긴 까만 점은 불과 몇 달 만에 껍질을 뚫고 신경까지 도달합니다. 아이가 “엄마 이 아파!”라고 말할 때쯤엔 이미 이전 글 **[악명 높은 신경치료]**를 받아야 하는 최악의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 유치의 진짜 역할 1: 영구치가 올라올 ‘내비게이션’
유치의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역할은 단순히 밥을 씹는 게 아닙니다. 바로 잇몸 뼈 밑에 숨어 자라고 있는 ‘영구치’가 제자리로 예쁘게 올라오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내비게이션) 역할입니다.

▲ 그림 설명: 유치(위쪽 작은 치아)의 뿌리 아래에는 평생 쓸 영구치(아래쪽 큰 치아)의 씨앗이 자라고 있으며, 유치가 빠지는 길을 따라 영구치가 올라오게 됩니다.
- 충치가 너무 심해져서 뼈가 녹고 유치를 너무 일찍 뽑아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 내비게이션(유치)이 사라진 영구치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엉뚱한 곳(입천장이나 볼 쪽)으로 뚫고 나옵니다. 즉, 심각한 ‘덧니’가 생겨 나중에 수백만 원을 들여 치아교정을 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3. 유치의 진짜 역할 2: 영구치 씨앗을 보호하는 방패
유치의 뿌리 바로 아래 잇몸뼈 속에는 평생 써야 할 영구치의 씨앗(치배)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둘의 거리는 불과 1~2mm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약 유치 충치를 방치해서 신경이 썩고 뿌리 끝에 고름 주머니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이 고름의 독성이 바로 밑에서 예쁘게 자라던 영구치 씨앗을 덮쳐버립니다. (마치 오염된 흙에서 자란 새싹과 같습니다.) 그 결과 영구치가 잇몸을 뚫고 나왔을 때 겉면이 하얗게 얼룩져 있거나, 찌그러지고 구멍이 난 기형 치아(터너 결절, Turner’s hypoplasia)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 그림 설명: 유치에 생긴 심한 충치(검은색)가 뿌리를 타고 내려가 염증을 일으키면, 바로 밑에서 자라던 영구치의 겉껍질을 파괴하여 기형(얼룩)을 유발합니다.
4. 치과 종사자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 치아 관리법
치과에서 아이들 치료에 ‘은니(SS 크라운)’를 많이 씌우는 이유도, 잘 떨어지는 찰흙(레진) 대신 가장 튼튼한 헬멧을 씌워 영구치가 날 때까지 공간을 완벽하게 버텨주기 위함입니다.
- 치실 사용은 필수: 아이들의 어금니는 딱 붙어있어 그 사이에 충치가 가장 많이 생깁니다. 이전 글 **[올바른 치실 사용법]**을 참고하여 부모님이 매일 밤 직접 치실을 튕겨주셔야 합니다.
- 불소도포: 유치의 약한 껍질을 단단하게 코팅해 주는 최고의 예방 주사입니다. 3~6개월 간격으로 칠해주세요.
- 만약 너무 일찍 뽑았다면? 반드시 치과에서 **’공간 유지 장치(Space maintainer)’**라는 철사를 끼워주어, 뒤쪽 어금니가 쓰러져 영구치 나올 자리를 막는 것을 예방해야 합니다.